본문 바로가기
역사인문 도서 리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양미술사 미술사 단박에 이해하기

by 북그란데 2024. 6. 29.
반응형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양 미술사 저자 이연식 책표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양 미술사 저자 이연식 책표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양 미술사》는 미술 초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대별 미술사조가 태어난 배경과 대표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알려준다.   

저자 소개 
이연식 
서울대 서양화 전공, 한국 예술종합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이연식의 서양 미술사 산책》, 《아트 대 아트》,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등 다수 있다.

고대 로마는 그리스 조각상 복제품이 유행하였다?

BC 2세기 후반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으나 그리스 문화를 추앙했다.  로마 귀족들은 그리스 청동 조각상들을 대리석으로 복제해 집과 정원을 꾸몄다. '창을 든 남자', '때를 미는 남자'는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대리석으로 복제했다. 청동보다 대리석이 더 쌌다. 

그리스 청동상은 파괴되거나 소실되었지만 로마시대 복제품은 살아남았다.
  

메디치 가문이 제일 좋아한 예술가는?

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르네상스대 3대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예술가를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은 다빈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고집해서 그림을 주문한 사람의 요구에 잘 따르지 않았다.

반면에 보티첼리는 메디치 가문의 취향에 맞게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는 메디치 가문의 주문이 보티첼리에게 갔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정물화가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네덜란드는 성모 마리아 상 등 성상을 모시지 않는 기독교 신교 국가였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 예술가들처럼 교회의 주문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가 발전하였다. 

16세기, 17세기 사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부르주아가 출현했다. 돈을 많이 모은 부르주아들은 집에 걸어들 그림이 필요했다.

특히, 네덜란드에서는 '바니타스'라는 정물화가 발전했다.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헛되다'라는 뜻이다. 분위기가 어둡다.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시든 꽃, 썩은 과일, 심지어 해골까지 그렸다. 물질적인 삶은 덧없으니 경건하게 살라는 의미다. 

풍경화는 언제부터 인기가 많았나?

풍경화는 18세기 이후로 발전하였다. 영국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 이탈리아 등 유럽 본토를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성행했다. 카날레토 등 이탈리아 화가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유적이나 풍광을 그려서 팔았다. 엽서 같은 역할이었다. 

인상주의는 튜브 물감의 발명으로 탄생하였다?

튜브 물감은 1841년  미국의 화가 존 고프 랜드가 만들어 특허를 냈다. 그전에는 유화 물감을 동물의 방광에 넣었으나 한번 열면 굳어서 쓸 수 없었다. 

화가들은 이젤과 튜브 물감을 가지고 야외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인상주의 그룹은 두 부류가 있었다 

부유한 했던 드가, 메리 카사트, 카유보트는 세련되고 냉랭한 그림을 그렸다. 돈 걱정을 하지 않았도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르느아르는 인정받고 싶어 했고 따스하고 행복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렸다.

기억해야 할 아트 딜러

#뒤랑 뤼엘  

인상주의는 처음에 프랑스에서 냉대를 받았다. 인상주의 그림을 많이 구입했던 프랑스 아트 딜러 뒤랑 뤼엘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미국 신흥부자들에게 그림을 팔았다. 미국이 남북전쟁이 끝나고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부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국이 인상주의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이유다.

#앙브루아즈 볼라르 

볼라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파리 미술계를 움직인 화상이다. 세잔, 르누아르, 마티스, 피카소 등을 무명시절부터 후원했다. 볼라르 화랑에는 예술가뿐 아니라 시인과 소설가들이 드나들었다. 

현대 예술의 분기점, 뒤샹의 '변기'

1917년 뒤샹은 독립미술 전시회에 '변기'라는 작품을 출품한다. 이를 '레디 메이드(기성제품)'라 이름 붙였다. 뒤샹의 시대는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뒤샹은 손으로 작품을 만드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예술의 세계로 끌어왔다.

여성화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과거에 예술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들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도 여성화가들은 있었다. 소포니스바 안귀솔라,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등은 당대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18세기와 19세기 여성들은 정식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영국은 1786년에 왕립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앙겔리카 카우프만, 메리 모저 2명이 회원으로 있었다.

인상주의 그룹에도 여성화가들이 있었다. 모리조는 마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메리 카사트는 미국인이자 여성이라는 두 가지 핸디캡이 있었다. 그러나 드가의 격려로 두 사람이 인상주의 그룹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간과 미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는 공간 자체다. 모네가 말련에 그린 초대형 그림 '수련' 시리즈는 그림과 공간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20세기 이후에는 공간이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 미국의 월터 드 마리아의 '번개 치는 들판', 덴마크 예술가 울라푸르 엘리아손 '무지개 파노라마' 같은 작품이 있다.  

느낀 점 

4차 산업시대에는 아트 딜러가 유망직업으로 꼽히고 있다. 예술계에서는 예술가와 아트 딜러가 실과 바늘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이 보티첼리에게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비너스의 탄생'같은 걸작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에서 들어서는 뒤랑 뒤엘이나 볼라르 같은 아트 딜러의 역할은 엄청나다. 특히 볼라르는 무명 화가들을 거장으로 키워내는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화상으로 유명하다.  
 
미술사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작정 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술 사조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알게 되면 그림을 이해하기 쉽다. 물론 미술을 제대로 알려면 역사뿐 아니라 신화와 종교 등 인문학적 지식도 필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양 미술사》는 쓱 읽기 좋다. 덤으로 짤막한 세계사도 배워간다. 편리하게 요리하는 '밀키트' 같다.  
 
유럽이나 미국 미술관에 가볼 계획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워밍업을 해보자. 유럽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도시 자체가 미술관이다. 미술사를 '1도' 모르고 간다면? 나중에는 비슷비슷한 성당들만 기억에 남을지도 모른다. 
 
나의 한 줄 리뷰 : 미술사를 속성 과외받는 느낌이다

반응형